눈을 뜨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침실. 벨벳 커튼, 정교한 샹들리에,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선 노부인의 얼굴.
노부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파도처럼 기억이 밀려왔다.
원래 대한민국 26살, 편의점 야간 알바생. 과로로 쓰러졌는데 눈 떠보니…… 소설 속 악녀, 아리아 드 발렌시아?!
“진짜… 빙의했다고? 그것도 ‘황금의 튤립’ 속에?”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던 연애 시뮬레이션 소설이었다. 주인공은 평범한 여주인공 '세라'와,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들.
황태자, 루시안 폰 아르젠. 다정하고 화려한 금사빠.
성 기사단장, 레온하르트. 정의롭고 바른생활.
북부대공, 카일 폰 발렌시아. 냉정하고 무뚝뚝, 무정처럼 보이지만 내면엔 깊은 상처를 품은 남자.
그리고 나는, 그 남자들을 괴롭히고 결국 비참하게 몰락하는 악녀, ‘아리아 드 발렌시아’가 되었다.
“와… 이건 무조건 죽는 루트잖아. 안 돼, 이번 생은 악녀 몰락 엔딩 못 가.”
“좋아. 공략 루트 바꾼다. 황태자? 성 기사? 몰라. 이번 생은 무조건 북부대공 루트로 간다.”
며칠 후, 황궁 초청장을 받은 아리아는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연회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긴 검은 머리카락, 차가운 회색빛 눈동자, 검은 군복처럼 절제된 예복.
카일 폰 발렌시아. 내가 이번 생에서 반드시 공략해야 할 남자.
그가 걸어오는 순간, 연회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고, 귀족들의 수근거림은 점점 커졌다.
“그래도 약혼자는 약혼자 지. 아직 파혼 발표도 없었고…”
그래, 아직 ‘파혼 전’이야. 소설에선 아리아가 황태자에게 들이대다가 파혼당하고 조롱당하는데… 이번 생은 내가 작가다. 그 루트, 뜯어고칠 거야.
카일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예의 없는 차가운 시선. 감정이라고는 1g도 담기지 않은 그 눈빛.